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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인 사고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힘을 지닙니다. 성공을 향한 여정에서 긍정마인드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원동력이 됩니다. 성공 철학과 마인드셋을 이해하고, 더 나은 삶을 만들어가기 위해 부와 성공 관련 책의 1일 1필사를 꾸준히 하려고 합니다. 이 글을 읽으신 모든 분들께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한 3:3) 그러나 군인 중 하나가 창으로 그의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한 19:34) 이 분은 물과 피로 오신 분,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물로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니라(요한1서 5:6)'
요한복음과 요한서에 따르면 인간은 '다시 태어나야'할 뿐만 아니라 물과 피로 태어나야 합니다. 물과 피로 다시 태어나는 두 가지 내적 경험은 두 가지 외적 의식인 세례와 성찬식으로 연결됩니다.
두 가지 외적 의식, 다시 말해 물로 태어나는 것을 상징하는 세례와 구세주의 피를 받아들인다는 것을 상징하는 성찬식의 포도주는 사람에게 약속된 진정한 태어남이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합니다.
물과 포도주를 외적으로 사용한다고 마음이 원하는 대로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물과 피라는 상징 뒤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성서는 수많은 비유를 사용해 진리를 설명합니다. 하지만 각각의 비유는 서로 다른 의미 수준의 진리를 상징합니다. 그 가운데 돌은 가장 낮은 수준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거대한 돌 하나가 우물 입구를 덮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모든 양 떼가 모이면 그들이 우물 입구에서 돌을 굴려 양 떼에게 물을 먹였다(창세기 29:2)' '그들이 돌처럼 바닥에 가라앉았다(출애 15:5)'
돌이 우물을 막는다는 것은 사람들이 진리의 상징적 계시를 표면적으로만 받아들인다는 것을 말합니다. 누군가가 그 돌을 굴려 치운다는 것은 비유나 우화 밑에 숨겨진 마음의 진리나 생명의 기원을 발견한다는 것이며, 글자 그대로 물은 마음의 진리 혹은 생명의 기원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물을 준다는 것은 마음의 진리를 나눠준다는 말입니다.
'내 목장의 양 떼는 너희들이다(에스겔서 34:31)' 글자 그대로의 의미만을 생각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물잔', 즉 마음의 진리를 거부하는 사람은 '돌처럼 바닥에 가라앉습니다' 그런 사람은 모든 것들이 갖는 내면의 관계는 보지 못한 채 순전히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으로만 판단하는 수준에 머물게 됩니다. 그래서 돌에 적힌 계명은 전부 지킬지 몰라도 내면의 계명은 하루 종일 어기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그는 다른 사람의 재물을 훔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업신여길지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행동은 그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받은 권리를 빼앗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리고 자녀라면 상속자, 곧 하느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라(로마서 8:17)'
현실의 불행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다면 당신은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물잔' 즉 마음의 진리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돌 항아리에 물을 채워야' 할 뿐만 아니라, 다시 말해 마음의 진리를 발견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물을 포도주로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발견한 진리를 실천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진리를 실천하며 살아야만 '포도주가 된 물을 맛볼(요한 2:9)' 수 있습니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근본적 권리입니다. 그는 '자신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마태 1:21)'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구원은 '물로만이 아닌, 물과 피로' 이루어집니다.
자신과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반드시 아는 것을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아는 것은 '물'이고, 그것을 행하는 것은 '피'입니다.
'그분은 물로만 오시지 않고, 물과 피로 오셨다' 이 모든 신비는 상상력을 적극적이고 의식적으로 사용하는 데 있습니다. 상상력은 당신과 다른 이들을 특정한 상태에 머물게 해 현실의 한계에서 구해줄 것입니다. 외적인 의식으로는 이러한 신비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곳에서 너희는 물동이를 들고 가는 한 남자를 만나리니 그를 따르라. 그가 어디로 들어가든 그가 들어가는 곳에 가서 그 집주인에게 말하거라.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내가 내 제자들과 유월절 음식을 먹을 손님방이 어디냐 하시더라' 하여라. 그러면 집주인이 너희에게 잘 갖춰지고 준비된 큰 위층 방을 보여줄 것이다. 그곳에서 우리를 맞을 준비를 하여라''
당신이 소망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이미 '갖춰지고 준비되어' 있습니다. 상상력은 당신과 당신이 원하는 의식 상태를 내적으로 연결해 줍니다. 당신이 원하는 모습이 이미 되었다고 상상한다면 당신은 '물동이를 든 남자'를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그 의식 상태에 머무른다면 당신은 유월절의 손님방에 들어가 당신의 영을 하느님의 손에, 다시 말해 당신 의식에 맡기는 것입니다.
경제원리에 따르면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의식 상태는 하느님의 무한한 창고에 대한 수요와 같습니다. 따라서 공급을 바꾸려면 수요, 다시 말해 당신의 의식 상태를 바꿔야 합니다.
당신이 소망하는 모습이 이미 되었다고 느껴야 합니다. 환경이 의식 상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의식 상태가 당신이 살아가는 삶의 환경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깨닫는다면 당신은 '생명의 물'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구세주, 다시 말해 문제의 해결은 단순희 그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로지 그 앎이 삶에 적용될 때 구세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당신의 소망이 실현되었다고 느끼고 그 상태에 계속 머물러 있을 때 '당신의 옆구리는 찔려져 그곳에서 물과 피가 나오게'될 것입니다. 오로지 이러한 방법으로만 예수님을, 다시 말해 문제의 해결책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대는 마음을 다스리는 일에 그대가 주인이며 군주임을 알아야 한다. 그대가 스스로 그것을 일으키지 않는 한 그대의 몸과 영혼은 범주 혹은 전체에 그 어떤 불씨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의식입니다. 하느님의 약속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수요가 변하지 않는다면 공급도 변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당신의 의식 상태가 바뀌지 않는다면 현재 당신이 처한 삶의 환경 또한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가 용서할 때', 즉 우리가 마음의 상태를 변화시킬 때, 이 법칙이 자동으로 작동합니다. 당신의 의식 상태는 행동의 원천이며 행동을 이끄는 힘이자 공급을 창출합니다.
'만약 내가 선고했던 그 국가가 그들의 악에서 돌아선다면 내가 그들에게 내리려고 생각했던 재앙을 돌이키리라. 그리고 내가 한 국가나 한 왕국을 세우고 심으려 할 때, 그들이 내가 보는 앞에서 악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따르지 아니하면 그때는 내가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한 복을 돌이키리라(예레미아 18:8)'
예레미아서의 이 구절은 개인이나 국가가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마음의 태도를 확고히 만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소망이 실현되었다는 느낌은 목표를 이루는 데 필요한 필수 조건입니다.
하느님이 모습을 드러내시니 하느님은 빛이더라. 어둠 속에 사는 가난한 영혼들에게. 하느님이 모습을 드러내시니 하느님은 인간의 모습이더라. 낮의 세계에 사는 영혼들에게. - 블레이크 -
이것은 경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경험은 당신의 경험을 대신할 수도 없습니다. 저는 그 교사에게 누군가에 대한 마음의 태도를 바꾸면 그 사람에게서도 그에 상응하는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법칙을 아는 것이 요한복음 5장 6절에 나오는 물의 진정한 의미이며, 아는 것만으로는 원하는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기에 충분하지 않고, 오직 '물과 피'에 의해서만, 즉 이러한 진리를 삶에 적용시켜야만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는 것은 생명의 물이고 아는 것을 행동에 옮기는 것은 구세주의 피입니다. 다시 말해, 아주 적은 지식이라도 행동으로 옮긴다면 행동으로 옮기지 않은 많은 지식보다 훨씬 유용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아버지 하느님은 자비와 동정, 평화, 사랑입니다. 그가 사랑하는 그의 자녀인 인간 또한 자비와 동정, 평화, 사랑입니다. - 블레이크, 신성한 형상 -
변화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변화를 일으킬 능력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물과 피'의 신비를 깨닫기 위해서는 학생이 변화되는 모습을 경험해야 합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경험으로는 대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의 피를 통해 구원받았다(에베소서 1:7)'
그대 마음을 제대로 한 번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그대는 두려움을 떠나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빛을 없습니다. 천년을 찾아 헤맨다고 해도 -매슈 아널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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