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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인 사고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힘을 지닙니다. 성공을 향한 여정에서 긍정마인드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원동력이 됩니다. 성공 철학과 마인드셋을 이해하고, 더 나은 삶을 만들어가기 위해 부와 성공 관련 책의 1일 1필사를 꾸준히 하려고 합니다. 이 글을 읽으신 모든 분들께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거울을 바라보는 사람은 눈이 거울 위에 머무른다. 하지만 그가 원한다면 거울 너머에 있는 천국을 볼 수 있다. - 조지 허버트, '묘약' -
물체가 인식되려면 먼저 어떤 방식으로든 물체에 대한 정보가 우리 뇌에 도달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환경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의식은 보통 감각이 주는 정보에 의존하고 그것에 국한되어 있지만, 인간은 감각에만 의존하는 것을 넘어 어떤 것이든 상상할 수 있으며 완전히 상상에 몰입되면 '눈이 머무는 것', 다시 말해 감각이 인지하는 것보다 더 생생하고 더 실체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인간은 그저 기계처럼 살아가며 자신의 삶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상상력입니다. 따라서 뇌에 종속된 존재가 아닌, 뇌를 지배하고 통제하는 주체입니다.
인간은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에 만족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은 감각적 인식의 수준을 넘어 관념적인 인식을 할 수 있습니다.
기계처럼 반응하는 감각의 영역을 넘어 상상의 영역으로 건너갈 수 있는 능력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발견입니다. 인간은 상상력을 이용해 내면의 변화를 만들고 이를 통해 밖으로 보이는 사건에 개입해 그 경로를 원하는 방향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 상상의 주체임을 드러냅니다.
상상 활동의 선봉에 서 있는 주의력은 '눈이 머무는 곳', 다시 말해 감각이 이끄는 대로 외부적인 것에 머물 수도 있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내면에 머물며 소망이 성취된 상태를 이끌 수도 있습니다.
감각적인 인식에서 관념적인 인식으로 넘어가려면, 다시 말해 보이는 상태에서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하는 상태로 넘어가려면 상상 속에서 그 장면 안으로 들어가 우리가 실제로 그러한 상태에 있고 그러한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면 보고 듣고 하게 될 것들을 가능한 한 실제처럼 생생하게 상상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걷지, 눈에 보이는 것으로 걷지 아니한다.(고린도후서 5:7)' 보이는 것으로 걸을 때 우리는 눈에 보이는 물체를 통해 길을 압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걸을 때 우리는 상상 속에서 보이는 장면과 행동들로 삶을 창조해 갑니다.
인간은 상상의 눈이나 감각을 통해 사물을 인지합니다. 하지만 사물을 인지할 때 인간이 가지는 마음의 태도는 두 가지로 나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상상력을 이용하여 소망하는 것을 창조하려는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외부 세계를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태도입니다.
인간 내면에는 생명의 원리와 죽음의 원리가 있습니다. 하나는 넘치는 상상력으로 상상의 구조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냉정한 현실의 기반 위에 상상의 구조물을 쌓아 올리는 것입니다.
전자는 창조를 하지만, 후자는 현 상태를 그대로 유지합니다. 인간은 믿음의 길이나 혹은 눈에 보이는 길을 택해야 합니다. 인간이 풍부한 상상력으로 상상의 구조물을 만들어 내면 그만큼 생명력을 얻습니다. 따라서 보이는 그대로를 비추는 감각의 거울을 넘어설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하는 것이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길입니다.
보이는 그대로를 비추는 감각의 거울에 '시선을 고정해' 상상력을 제한한다면 삶은 발전하지 못합니다. 허울만 그럴듯한 현실은 '상상의 눈'을 가려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진리(요한 8:32)'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상상의 눈'은 가려지지만 않는다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을 봅니다. 눈에 보이는 장면이 아무리 익숙하다고 할지라도 상상의 눈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감각이 보여주는 외부 세계에 지나치게 집착하면 일상의 삶이 완전히 속박당하고 우리의 시선은 현실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러한 집착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상상의 눈' 뿐입니다.
우리는 소망을 생각하는 것에서, 소망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생각하기로 옮겨 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소망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생각하기, 다시 말해 소망이 이루어진 상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험은 주체와 객체를 하나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소망을 생각하는 것은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생각하는 나와 내가 생각하는 대상이 따로 존재합니다.
자신을 내려놓는 것, 그것이 해답입니다. 우리는 소망이 이루어진 상태에 우리 자신을 맡기고 그 상태에 푹 빠져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현재 상태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소망이 이루어진 상태에 머물며 살아가게 됩니다. 상상 속에서 소망이 이루어진 상태를 확고하게 만들면 그 상태가 현실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믿음에 사랑이 더해지면 자신을 맡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지도 않는 것에 자신을 맡길 수 없습니다. '그대가 무언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결코 그 어떤 것도 만들어 내지 못할 것이다' 하느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합니다.
하느님은 자신이 창조한 그 어떤 것도 경멸하지 않습니다. 미워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그 어떤 것도 창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지혜서 11:24 인용)
소망하는 상태에 생명을 불어넣으려면 그것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살아있다. 하지만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 안에 사는 것이다. 내가 지금 육신을 빌어 사는 이 삶은 나를 사랑하시어 내게 자신을 내어주신 하느님을 향한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 나는 살아 있다. 그러나 나는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이제 내가 육신을 입어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신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갈라디아서 2:20)'
하느님은 사랑으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왔습니다. 자신을 내어놓는 이러한 행동으로 창조물이 창조자가 되게 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하는 자녀로서 하느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을 내어놓으신 하느님처럼 우리 역시 우리가 사랑하는 것에 자신을 내어놓아야 합니다.
소망하는 상태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그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상상의 초점은 의식적으로 옮길 수 있습니다. 지금은 상상의 활동이 활발하지 못해 그저 소망에 지나지 않더라도 더 깊게 집중하고 생각하면 상상의 초점이 내면으로 깊게 들어가 우리 자신을 소망하는 상태와 하나가 되게 합니다.
상상의 초점을 옮길 수 있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 모든 활동은 전적으로 심리적입니다.
상상의 초점은 물리적인 위치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위치를 바꾸는 것입니다. 감각적 한계는 주관적으로 형성되는 것입니다. 감각에만 주의를 기울이면 상상의 눈은 진실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감각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삶을 만드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 무한한 상상입니다. 감각 세상에서는 보이는 것만 봅니다. 하지만 상상의 세계에서는 보고 싶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고 싶은 것을 보면서 그것을 감각 세계에서도 볼 수 있도록 창조합니다.
우리는 외부 세상을 별다른 생각 없이 봅니다. 따라서 보고 싶은 것을 보려면 자발적이고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미래는 창조적인 행진을 하는 상상력이 만듭니다. 우리는 대개 견고하고 합리적인 세상에 살고 있다고 믿지만, 겉으로 보기에 단단한 이 세상은 사실 처음부터 끝까지 상상력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존재하는 곳에서만 행동할 수 있다. 그러나 진심으로 묻노니,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 토마스 칼라일 -
인간은 상상력 자체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이 상상하는 바로 그곳에 존재해야 합니다. 상상력이 바로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상상력은 그것이 인식하고 있는 상태에서 활동하고 그 상태를 기반으로 움직입니다. 우리가 의식의 변화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믿음을 뛰어넘는 가능성이 열릴 것입니다.
감각은 강제적이고 부정적인 방식으로 결혼을 치르듯 인간을 묶어두려 합니다. 하지만 상상력을 이용한다면 부정적인 결혼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감각이 주는 정보에 의존할 필요가 없습니다. 의식의 초점을 바꾸십시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십시오.
내면의 변화가 조금이라도 일어난다면 세상을 보는 관점도 조금씩 달라질 것입니다. 보통은 의식이 달라지려면 신체 기관의 움직임이 수반되어야 하지만 의식을 그런 제약에 가둘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의식하느냐에 따라 의식의 초점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상상력의 구현입니다. 그리고 그 상상력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진정한 자아, 다시 말해 상상력이 신체라는 공간적 영역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것, 그것이 핵심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우리가 보편적으로 분명하게 받아들이는 세상과 본질적으로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블레이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보여지는 것에 대해 창문에게 묻지 않듯 육체적인 눈이나 자연의 눈에게 묻지 않는다. 나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눈을 통해서 그 너머를 본다.'
눈을 통해서 그 너머를 본다는 것은 의식을 '이 세상'뿐만 아니라 '다른 세상'으로 옮겨 놓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천문학자들은 신비주의자들이 그토록 쉽게 실행했던 '눈을 통해 그 너머를 보는 것' 다시 말해 내면의 여행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 해야 합니다.
나는 인간의 땅을 여행했네. 남자와 여자들의 땅 말일세. 아주 무시무시한 것들을 듣고 보았지. 대지를 떠도는 차가운 방랑자들은 결코 알지 못할 것들을. - 블레이크, '마음의 여행자' -
아주 오래전부터 깨달음을 얻는 사람들은 마음의 여행을 실천해 왔습니다.
- 네빌 고다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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